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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대삼각점-거제 옥녀봉

by 와송 2018. 2. 26.

대삼각점-우리나라 측량의 기준점이 되는 대삼각점이 옥녀봉에 있다

100년 전 지도
 
최근 한일 과거사 청산 문제가 이슈화 되어 나라가 시끄럽다. 과거사 청산을 어떠한 기준에서, 어느 범위로, 어떻게 청산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도> 한가지를 놓고 보더라도 과거사를 제대로 밝혀, 국민들에게 진실을 알려야 한다.

우리나라의 국토기본도를 제작, 보급하는 국가 기관인 국토지리정보원 홈페이지에 실린 ‘국토지리정보원의 발자취’에 보면 ‘현대 지도제작 사업의 출발’이라는 제하에 이런 글이 있다.

「조선 후기 정상기, 김정호 등이 이룬 업적을 바탕으로 대한제국시대에 현대식 측량을 담당하는 기관인 <양지아문>이 설치되어 최초의 현대식 지도인 <대한전도>를 1899년에 발간하였다. 그 이후 1909년에도 토지조사 사업의 일환으로 삼각측량, 수준측량, 지형측량 등을 실시하여 남북한 지도 727도엽을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위의 글을 보면 마치 <양지아문>에서 지도를 제작하고, 측량하여 남북한 지도를 제작한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양지아문>은 고종이 열강 제국의 틈바구니에서 독립을 하기 위해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듬해인 1898년 7월 6일 지적측량 업무를 관장하는 기구로 개설되었으나 4년도 못 되는 1901년 12월에 폐지되었고, 1899년에 발간하였다는 <대한전도>는 양지아문이 아닌 학부편집국에서 간행한 것이다. 그리고 1909년은 이미 국운이 쇄하여 일본의 지배 하에 놓인 시기이기 때문에 지도를 제작할 능력이 없던 때이다.

일본의 시미즈야스오(淸水靖夫)가 펴낸 <日本統治機關作製에 관련한 朝鮮半島地形圖의 槪要>란 책을 보면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다.

조선 통치를 위해 일본이 제작한 조선의 기본도는 일본과 같은 1:50,000지형도로 내용이 약간씩 다른 세 종류의 지도가 제작되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단독 지배할 수 있는 길이 열리자 일본군 육지측량부대를 비밀리에 파견하여 측도를 시작하였는데 이렇게 작성된 지도가 신속측도(迅速測圖)라 불리는 약도(略圖) 형태의 <제1차 지형도>이다.

이후 일본은 1904년 러시아와 전쟁을 벌리면서 각료회의에서 대한(對韓) 시설강령을 결정하는 등 조선을 침탈할 준비를 진행시키고 있었으며,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자 1905년 11월 17일 조선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함은 물론 일본의 보호국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그로부터 불과 5년 뒤인 1910년 8월 29일, 세계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강국이 된 일본제국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조선의 국권을 강탈하는 합방조약을 체결하고, 조선반도를 그들의 영토로 삼고 식민지 통치를 하게 된다.

한일합방 후 정식으로 측량한 데이터를 수정하여 작성한 지형도가 <제2차 지형도>인데 이 지형도는 약도를 수정하여 작성한 것이지만 내용은 약도보다 많이 보완되어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이후 삼각측량에 의해 위치의 기준을 두고 제작된 지형도가 <제3차 지형도>인 완전한 5만분의 1 지형도 이다.

기선측량, 대삼각측량, 소삼각측량, 수준측량 등을 일련으로 하는 조선반도의 삼각측량은 합방전인 1910년 6월 대전 기선의 위치 선정에 착수한 이래 1915년까지 실시되었다. 당초 기준점은 조선반도 중앙부에 설치할 방침이었으나 일정과 경비 등 사정으로 일본 쓰시마 섬(對馬島)의 온다께(御岳)와 아리야께야마(有明山)에 설치된 1등삼각점에서 연결하도록 계획을 변경하고, 쓰시마 섬에서 해상으로 80km 떨어진 부산 절영도와 거제도에 연결하여 대삼각점을 설치하였다. 이같이 변칙적으로 설치된 절영도와 거제도의 대삼각점을 기점으로 남부 지방에서부터 서북 방향으로 측량을 했기 때문에 엄밀이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측지 기준점의 근간은 일본의 측지 기준점에 연결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삼각점에 의거 지형, 지물을 측도하는 지형측량은 1913년부터 착수하였고, 제도와 제판 작업을 거쳐 1918년에 조선반도 전역의 5만분의 1 지형도 722매를 완성하였다. 이 지형도는 군사 목적으로 사용하게끔 일본군 육지측량부 방식을 그대로 채택하였고, 지형도의 인쇄와 발행도 육지측량부가 관장하여 철저하게 지형도를 관리하였다. 이 지형도는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사용되다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미 군정청이 지도 원판을 인수하였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육군본부로 이관되어 일부 내용 수정을 거쳐 남한지역에 한 해 민수용으로 제작하여 1960년대 초까지 사용되었다.

지금부터 100년 전 일본이 조선반도 전역의 5만분의 1 지형도를 제작할 수 있었던 배경과 능력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당시 조선의 상황은 어땠는가, 나라의 안전을 청국에 의지한 채 자위능력 조차 없는 무기력 그 자체였다. 이러한 조선 조정은 일본에서 신문물을 배우고 돌아온 인재들을 등용하기는커녕 자신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그들을 유배 보내기까지 했다. 1897년에 일본에서 지형측량을 배우고 돌아 온 이주환, 남순희 같은 기술자들도 <양지아문>에서 받아주지 않았다니 당시의 상황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1868년 명치유신을 일으킨 일본은 국가체제를 확립하고, 서양의 선진 지식과 기술을 받아들여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였고, 측량이나 지도 제작에 있어서도 유럽으로부터 측량 전문가를 초빙함은 물론 유학생들을 프랑스나 독일 등지에 파견하여 독자적인 측량 기술을 축적하였다.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펼치며 빗장을 걸어 닫고 있을 무렵인 1874년 일본은 이미 내무성에 지리요를 설치하여 전국을 측량하고 지도를 제작할 기본 계획을 수립하였고, 1884년에는 육군참모본부 산하에 측량국을 설치하여 동경에 경위도 원점을 정하고 1895년부터는 1:5만 지형도를 제작할 정도로 근대화가 되어 있었다.

따져 보면 일제에 의해 제작된 한반도 최초의 5만분의 1 지형도도 80%는 그들이 양성한 조선인들의 손에 의해 제작된 것이다. 수치스러운 역사도 엄연한 역사이기 때문에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지고 지난 역사를 되돌아 봐야할 것이다. - 崔宣雄地圖 이야기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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