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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사명대사 생가지와 기념관

by 와송 2017. 12. 4.

사명대사 생가지

밀양시 관내 초등학생들이 단체관람을 왔다

사명대사(四溟大師)

 조선중기의 고승,호는 사명당(四溟堂) 송운(松雲) 종봉(種峯),()은 임(),자는 이환(離幻),

법명(法名)은 유정(惟政),본관은 풍천(豐川),수성(守成)의 아들,경남 밀양 출신,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조부(祖父) 밑에서 공부했고,1556(명종11) 13세 때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를 읽다가

황악산(黃岳山)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신묵화상(信墨和尙)으로부터 선()을 받아 승려가 되었다.

1561(명종16) 승과(僧科)에 급제한 이후 묘향산에서 휴정(休靜:西山大師)의 법을 이어받았다.

1592(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승병(義僧兵)을 모집,

휴정의 휘하에 들어가 승군도총섭(僧軍都摠攝)이 되어 명나라 군사와 협력,

평양성의 수복전(收復戰)을 승리로 이끌었다.

임진.정유전란 중에 왜장 가등청정(加籐淸正)의 진중을 3차례에 걸쳐 단신으로 들어가 담판하는 등

외교는 물론 전술 전략에 있어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여 많은 공훈을 세웠다.

1604년 국서(國書)을 휴대하고 일본에 건너가 도꾸가와(德川家康)를 만나 강화를 맺고,

포로로 잡혀간 양민 35백명을 인솔하여 귀국하였으며,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사명대사는 그의 장년기를 병마의 풍진(風塵) 속에서 보내어 법문(法文)을 많이 남기지 못하였고

또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귀산(歸山)하기를 청하였으나 국사로 인하여 조정(朝廷)으로부터 윤허(允許)를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조선 전기에 , 敎 兩宗을 통합하여 조계종으로 일원화한

서산대사의 四大門弟 가운데 首門으로서,松雲派를 창시한 高僧이다.

 

앞에 보이는 능선 너머는  창녕이다

사명대사 생가지는 산 좋고 물 좋은 밀양 전체 지역중에서도

오지에 속하는 곳이다

그런 곳에 사명대사 조부 증조부 고조부등이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도

이런 오지 비슷한 곳에 터를 잡았다는 것은

아마도 풍수지리를 보고 터를 잡은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명대사 기념관

왜놈들은 조총을 가지고 싸우는데

우리는 겨우 칼과 낫등 농기구로 싸웠으니

그것이 상대가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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