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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임진왜란 창의기념비-밀양 석골사

by 와송 2016. 1. 18.

 

 

형제굴(兄弟屈)
석골사를 중심으로 억산(994m)을 향하여 좌측 계곡을 타고 비좁은 비탈길 1.4km지점 수십미터 바위벼랑 중허리에 두 개의 굴이 있어 형제굴(이경홍 이경승 형제)이다. 산 정상 쪽의 조금 작은 바위굴에는 노모를 모시고 살았던 사택 격이었고, 아래쪽의 큰 굴은 적어도 30여 명이 합숙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어서 의병들의 병사(兵舍)였음을 알 수 있다.

근재 이경홍(1540~1595)은 금시당 이광진 선생의 장남으로 1569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1년에 국천(國薦)으로 준원전참봉에 제수되어 북관(北關)의 임지에 부임했다가, 이듬해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달려와 향병(鄕兵)을 모집하여 아우 이경승과 창의하였다.

망우당 곽재우진영으로 합류하여 전장의 최후는 알 수 없게 되었다. 진사 이경승(1553~1594)은 금시당 이광진 선생의 차남으로 생원 이광로의 양자 이다. 1588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족을 이끌고 석골동으로 피난하여 백형인 근재공을 따라 오한 손기양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망우당 곽재우의 진영(陣營)으로 합류하여 전장에서 그 백형과 함께 최후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손가굴(孫家屈)
역시 석골사의 우측으로 운문산을 향하여 계곡을 따라 약 0.6km를 오르면 팔풍재로 갈라지는 계곡 삼거리가 나타나고, 줄곧 오른쪽 계곡 길로 약 1.4km 오르면 또 딱밭재로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온다. 못 본체로 1,8km 정도 더 오르면 ‘정구지바위’라 불리는 큰 바위 하나가 계곡의 왕처럼 버티고 섰다. 이 바위에서 오른쪽으로 토끼길을 따라 230m지점에 서늘한 제2 얼음골이다. 겉으로 보아서는 그냥 지나치는 바위 들겅 사이로 사람이 겨우 드나들 수 있는 틈새가 보인다. 동굴에 드는 기분으로 들어가면 안쪽에는 열 평 넘어 보이는 자연석굴이라 군사 30여 명은 충분히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이다. 가까운 곳에 두 개의 굴이 더 있어 여기에서 오한  선생의 양친과 가족이 피난하면서 의병을 모아 진사 이경승 형제와 창의한 것이다.  

오한 손기양(1559~1617)선생은 29세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31세에 성주교수로 임명되고, 1591년 가을에 밀양에 왔다가 이듬해 1592년 4월에 왜구가 몰려오자 양친을 모시고 이곳 석동으로 피난하였다. 박진부사의 부군(府軍)과 합세하여 적과 싸우다 관군과 함께 무너지고, 근재 이경홍과 진사 이경승과 함께 망우당 곽재우가 진을 친 화왕산으로 갔다가, 얼마 뒤에 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에 임명되자 1593년 양친을 모시고 청도서지역(淸道西枝驛)으로 이사하여 밀양 최초의 의병창설자들의 이별이 오고 말았다.
 

 

                                                                                                                                          이순공/밀양향토사연구소

                                                                                                             

 

 

밀양 석골사 입구에 있는 기념비

창의(倡義)의 뜻/국난을 당하였을 때 나라를 위하여 의병을 일으키는 것

 

 손가굴 내부 모습-형제굴에 비해 손가굴은 내부가 제법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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