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산서원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선생의 유덕이 서린 곳으로
경주에서 약 30Km 떨어져 있으며, 안강읍에서 서북쪽으로 약 10Km 떨어진
산수가 수려한 도덕산과 자옥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이 옥산서원은 회재(晦齋)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된 후인 1572년(선조 5년)에
경주부윤 이제민과 권덕린등 도내 유림들이 이언적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하여
서원자리를 정하고 묘우(廟宇)를 건립하였다.
다음해에 서악의 향현사에 있던 위패를 모셔 왔으며,
같은 해에 관찰사 김계휘가 왕에게 청하여
1574년(선조 7년)에 '옥산(玉山)'이라는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최초 사액은 이산해(李山海)의 글씨였으나
헌종 4년(1838)에 구인당이 화재를 입어 다시 사액을 받으니
현전하는 것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글씨이다.
옥산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시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정문인 역락문(亦樂門)을 들어서면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인
무변루(無邊樓)가 있는데 2층 양측 협실과 1층 통문을 갖추었고
모두 원주(圓柱)에 난간을 돌렸다.
문루 뒤 중앙에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강당인 구인당(求仁堂) 역시 원주를 사용하고
편액은 무변루와 같이 한쌍의 글씨로 대청 뒤에 걸려 있다.
좌측에는 배립제, 우측에는 양진제(兩進齊)란 작은 방이 있고,
강당 앞 좌측에는 민구제(敏求齊) 등이 있다.
경내 건물인 체인묘에는 이언적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구인당은 강당으로서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학문의 토론장소로 사용되었다.
제기실은 향례 때에 사용하는 제기를 보관하는 곳이며,
암수재와 민구재는 유생들이 수학하며 거처하는 곳이다.
무변루는 2층 누각으로 유생들이 휴식하는 곳이며,
역락문은 무변루의 문으로 『논어』의 「학이조(學而條)」에 나오는
"불역낙호(不亦樂乎)"의 뜻을 취한 것이다.
신도비각은 1577년(선조 10년)에 이언적의 신도비를 모셨으며,
경각과 판각에는 각종 판각 및 어서를 보관하였다.
매년 2월 중정(두번째 정일)과 8월의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또한 1972년에는 청분각을 새로 짓고 보물 제 525호로 지정된 삼국사기를 비롯,
총 866종 4,111권의 서책을 어서각, 경각 등에서 옮겨 소장 보관하고 있다.
유물로는 필연, 연수병, 관대, 사모, 마상배, 관영, 옥적, 직인, 유서통, 옥관자, 금관자,
옥죽 2본과 『회재선생문집』외 1,000여권의 문집과 책이 보관되어 있다.
이언적 수필고본은 1975년에 보물 제586호로, 김부식의 『삼국사기』 완본 9책은
1970년에 보물 제525호로 각각 지정되었다.
국내 최고의『정덕계유사마방목(正德癸酉司馬榜目)』 1책은 보물 제524호로,
『해동명적』 2책은 보물 제5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서원은 전면에 강학처소를 두고
후면에 사당을 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취하고 있다.
옥산서원과 독락당 주위의 승경으로는 용추(龍湫)와 오대(五臺)가 유명한데
서원 앞의 폭포는 깊이가 4m가 넘고 폭이 3m쯤 되며
양쪽으로 깎아지른 암벽 사이의 길이가 10m쯤되는 용추는 지금 보아도 장관이다.
그리고 용추 위 100여명이 앉아도 족한 펑퍼짐한 암반이 세심대(洗心臺)이다.
퇴계선생의 필적으로 '龍湫', '洗心臺'라고 음각한 글씨가 지금도 완연히 남아 있다.
'해맞이,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름나들이2(간월재-월전) (0) | 2009.08.18 |
---|---|
다대포 낙조 음악 분수-다대포 (0) | 2009.07.14 |
2009년 기축년의 해맞이-광안대교에서 (0) | 2009.01.02 |
충주호-귀항 (0) | 2008.05.06 |
충주호(옥순교에서 장회나루 구간) (0) | 2008.05.0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