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서산과 삼태봉 사이에는 신라 문무왕 때 창건된 원원사(遠願寺)라는 절이 있다.
이 절은 통일신라 때부터 호국사찰로 자리매김했다.
삼국유사 등에 기록된 원원사 창건 이야기만 봐도 그렇다.
이 절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룩한 김유신이 신라 신인종의 창시자인 명랑법사의 후예인 안혜 남융 등과 함께 창건했는데,
그 목적이 실은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을 지키는 숨겨진 병영 기지화였다고 한다.
계곡 깊숙한 곳에 자리한 지리적 이점 때문에 서라벌의 관문이었던 관문성(일명 만리성)을 내려다볼 수 있고,
반대로 관문성에서는 이 절이 보이지 않으니 천혜의 전진기지였던 셈이다.
병사들이 일부러 머리를 깎고 승려로 변장해 이 절에 머물렀다고 한다.
절 이름도 '신라의 영원한 번영을 바란다'는 뜻이 담겨 있다.
또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는 경주 일대의 의병장과 승병장들이 이 절에 모여 작전회의를 하고,
동래를 거쳐 경주로 진격하던 왜군과의 일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현재의 천불보전 뒤 언덕은 옛 금당터인데 그 앞에 삼층석탑이 동서 쌍탑 형태로 버티고 서 있다.
보물 제1429호인 원원사지 삼층석탑은 기단부에 12지신을 양각하고 그 위에는 4천왕상을 새겼는데
그 기법과 솜씨가 빼어나기로 명성이 높다.
한편 모화리는 신라 때부터 서라벌의 관문 역할을 한 마을이다.
털 모(毛)자에 불 화(火)자를 쓰며, 도성 전체가 불국토나 마찬가지였던 서라벌에 들어가려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머리를 깎았고 그 머리털을 태운 곳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지금은 머리털 대신 소고기를 굽는 모화숯불단지가 유명하다.-국제신문 발췌
절 입구 좌우에서 금강력사가 절을 지키고 있었다
사천왕상이 석불로 세워져 있는 것도 특이하다
절이 천년고찰 답게 위엄을 지니고 있으며
전체적인 분위기가 고즈넉하고 아담하다.
절의 배치도 짜임새가 있어 소란스럽지 않다.
절 뒤편에서 절의 배치와 앞산을 바라보면
아주 아늑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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