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석

백월산-창원

와송 2008. 1. 14. 14:32





백월산의 전설

옛 노인들이 서로 전해서 말한다. "옛날에 당()나라 황제(皇帝)가 어느 때에 못을 하나 팠는데,

달마다 보름 전이면 달빛이 밝고, 못 가운데에 산이 하나 있고 사자(獅子)처럼 생긴 바위가

꽃 사이로 은은히 비쳐서 못 가운데에 그림자를 나타냈다.

황제는 화공(畵工)을 시켜서 그 모양을 그리게 하여 사자(使者)를 보내서 온 천하를 돌면서 찾도록 했다.

사자가 해동(海東)에 이르러 보니 그 산에 큰 사자암(獅子巖)이 있고

산의 서남쪽 이보(二步)쯤 되는 곳에 삼산(三山)이 있는데

그 이름은 화산(花山; 그 산의 몸체는 하나인데 봉우리가 셋이어서 삼산三山이라고 했다)으로서

모양이 그림과 같았다.

그러나 아직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없어서 신 한 짝을 사자암 꼭대기에 걸어 놓고 돌아와 아뢰었다.

그런데 신 그림자도 역시 못에 비치므로 황제는 이상히 여겨 그 산 이름을 백월산(白月山)이라고 했다

(보름 전에는 백월白月의 그림자가 못에 나타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그러나 그 후로는 못 가운데에 산 그림자가 없어졌다."

삼국유사-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이야기

남백월이성(南白月二聖), 노힐부득(努힐夫得)과 달달박박(달달朴朴)

<백월산양성성도기(白月山兩聖成道記)>에 이렇게 말하였다.

"백월산(白月山)은 신라 구사군(仇史郡; 옛날의 굴자군屈自郡.

지금의 의안군義安郡)의 북쪽에 있었다.

산봉우리는 기이하고 빼어났는데 그 산줄기가 수백 리에 뻗쳐 있어 참으로 큰 진산(鎭山)이다."

이 산의 동남쪽 3,000보 쯤 되는 곳에 선천촌(仙川村)이 있고, 그 마을에는 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 하나는 노힐부득(努힐夫得; 혹은 등等)이니 아버지는 이름을 월장(月藏)이라 했고,

어머니는 미승(味勝)이라 했다. 또 하나는 달달박박(달달朴朴)이니 그의 아버지는 이름을 수범(修梵)이라 했고,

어머니는 범마(梵摩)라 했다

(향전鄕傳에는 치산촌雉山村이라 했으나 잘못이다.

두 선비의 이름은 방언方言이니 두 집에는 각각 두 선비의 마음과 행동이

등등騰騰하고 고절苦節하다는 두 가지 뜻에서 이렇게 이름지은 것이다).

이들은 모두 풍채와 골격(骨格)이 범상치 않았고, 속세를 떠난 마음이 있어 서로 좋은 친구였다.

20세가 되자 마을 동북쪽 고개 밖에 있는 법적방(法積房)에 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서남쪽 치산촌(雉山村) 법종곡(法宗谷) 승도촌(僧道村)에 옛절이 있는데,

서진(栖眞)할 만하다는 말을 듣고, 함께 가서 대불전(大佛田소불전(小佛田)의 두 마을에 각각 살았다.

부득(夫得)은 회진암(懷眞巖)에 살았는데 혹은 이곳을 양사(壤寺; 지금 회진동懷眞洞에 옛 절터가 있으니 이것이다)라고도 했고,

박박(朴朴)은 유리광사(瑠璃光寺; 지금 이산梨山 위에 절터가 있는 것이 이것이다)에 살았다.

이들은 모두 처자(妻子)를 데리고 와서 살면서 산업(産業)을 경영하고 서로 왕래하면서

정신을 수양하고 편안히 마을을 길러 속세를 떠날 마음을 잠시도 폐하지 않았다.

그들은 몸과 세상의 무상(無常)함을 느껴 서로 말했다.

"기름진 밭과 풍년 든 해는 참으로 좋은 것이지만 의식(衣食)이 마음대로 생기고

자연히 배부르고 따뜻함을 얻는 것만 못하다. 또 부녀(婦女)와 집이 참으로 좋으나,

연지화장(蓮池花藏)에서 여러 부처가 앵무새나 공작새와 함께 놀면서 서로 즐기는 것만 못하다.

더구나 불도(佛道)를 배우면 응당 부처가 되고, 참된 것을 닦으면 반드시 참된 것을 얻는 데에 있어서랴.

지금 우리들은 이미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으니 마땅히 몸에 얽매어 있는 것을 벗어 버리고

무상(無上)의 도()를 이루어야 할 것인데, 어찌 이 풍진(風塵) 속에 파묻혀

세속 무리들과 같이 지내서야 되겠는가."

이들은 드디어 인간 세상을 떠나서 장차 깊은 골짜기에 숨으려 했다.

어느날 밤 꿈에 백호(白毫)의 빛이 서쪽에서 오더니 빛 속에서 금빛 팔이 내려와서

두 사람의 이마를 쓰다듬어 주었다. 꿈에서 깨어 그 얘기를 하니 두 사람의 말이 똑같으므로

이들은 모두 한참동안 감탄하다가 드디어 백월산(白月山) 무등곡(無等谷; 지금의 남수동南藪洞)으로

들어갔다.

박박사(朴朴師)는 북쪽 고개의 사자암(獅子巖)을 차지하여 판잣집 8척 방을 만들고 살았으므로

판방(板房)이라 하고, 부득사(夫得師)는 동쪽 고개의 무더기 돌 아래 물이 있는 곳을 차지하고

역시 방을 만들어 살았으므로 뇌방(磊房)이라고 했다

(향전鄕傳에는, 부득夫得은 산 북쪽 유리동瑠璃洞에 살았으니 곧 지금의 판방板房이요,

박박朴朴은 산 남쪽 법정동法精洞 뇌방磊房에 살았다고 했으니 이 기록과는 서로 반대된다.

지금 와서 보면 향전鄕傳이 잘못되었다).

이들은 각각 암자에 살면서 부득(夫得)은 미륵불(彌勒佛)성심껏 구했고,

박박(朴朴)은 미타불(彌陀佛)을 경례하고 염송(念誦)했다.

3년이 못되어 경룡(景龍) 3년 기유(己酉; 709) 4 8일은 성덕왕(聖德王) 즉위 8년이다.

해는 저물어가는데 나이 20이 가깝고 얼굴이 매우 아름다운 낭자(娘子)가 난초의 향기와 사향 냄새를

풍기면서 갑자기 북암(北庵; 향전鄕傳에는 남암南庵이라 했다)에 와서 자고 가기를 청하면서

글을 지어 바친다.

갈 길 더딘데 해는 떨어져 모든 산이 어둡고,

길은 막히고 성은 멀어 인가도 아득하네.

오늘은 이 암자에서 자려 하오니,

자비스러운 스님은 노하지 마오.

박박(朴朴)은 말했다. "절은 깨끗해야 하는 것이니 그대가 가까이 올 곳이 아니오.

어서 다른 데로 가고 여기에서 지체하지 마시오."하고는 문을 닫고 들어갔다

(기記에는 말하기를, "나는 모든 잡념雜念이 없으니 혈낭血囊을 가지고 시험하지 말라"고 했다).

낭자(娘子)남암(南庵; 향전鄕傳에는 북암北庵)으로 돌아가서 또 전과 같이 청하니 부득(夫得)은 말했다.

"그대는 이 밤중에 어디서 왔는가." 낭자가 대답한다. "맑기가 태허(太虛)와 같은데

어찌 오고 가는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어진 선배의 바라는 뜻이 깊고 덕행(德行)이 높고 굳다는

말을 듣고 장차 도와서 보리(菩提)를 이루고자 해서일 뿐입니다." 그리고는 게() 하나를 주었다.

해 저문 깊은 산길에,

가도 가도 인가는 보이지 않네.

대나무와 소나무 그늘은 그윽하기만 하고,

시내와 골짜기에 물소리 더욱 새로워라.

길 잃어 잘 곳 찾는 게 아니요,

존사(尊師)를 인도하려 함일세.

원컨대 내 청 들어만 주시고,

길손이 누구인지 묻지 마오.

부득사(夫得師)는 이 말을 듣고 몹시 놀라면서 말했다. "이곳은 여자와 함께 있을 곳이 아니나,

중생(衆生)을 따르는 것도 역시 보살행(菩薩行)의 하나일 것이오. 더구나 깊은 산골짜기에

날이 어두웠으니 어찌 소홀히 대접할 수 있겠소." 이에 그를 맞아 읍()하고 암자 안에 있게 했다.

밤이 되자 부득은 마음을 맑게 하고 지조를 닦아 희미한 등불이 비치는 벽 밑에서 고요히 염불했다.

밤이 새려 할 때 낭자는 부득을 불러 말했다. "내가 불행히 마침 산고(産故)가 있으니

원컨대 스님께서는 짚 자리를 준비해 주십시오." 부득이 불쌍히 여겨 거절하지 못하고

은은히 촛불을 비치니 낭자는 이미 해산을 끝내고 또 다시 목욕하기를 청한다.

부득은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마음속에 얽혔으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그보다 더해서 마지못하여

또 목욕통을 준비해서 낭자를 통 안에 앉히고 물을 데워 목욕을 시키니 이미 통 속 물에서 향기가

강하게 풍기면서 금액(金液)으로 변한다. 부득이 크게 놀라자 낭자가 말했다.

"우리 스승께서도 이 물에 목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부득이 마지못하여 그 말에 좇았더니

갑자기 정신이 상쾌해지는 것을 깨닫고 살결이 금빛으로 되고,

그 옆을 보니 졸지에 연대(蓮帶) 하나가 생겼다. 낭자가 부득에게 앉기를 권하고 말한다.

"나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인데 여기 와서 대사를 도와 대보리(大菩提)를 이루도록 한 것이오."

말을 마치더니 이내 보이지 않았다.

한편 박박(朴朴)이 생각하기를,

"부득이 오늘 밤에 반드시 계()를 더럽혔을 것이니 비웃어 주리라"하고 가서 보니

부득은 연화대(蓮花臺)에 앉아 미륵존상(彌勒尊像)이 되어 광명(光明)을 내뿜는데

그 몸은 금빛으로 변해 있었다. 박박은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말한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습니까." 부득이 그 까닭을 자세히 말해 주니 박박은 탄식해 말한다.

"나는 마음 속에 가린 것이 있어서, 다행히 부처님을 만났으나 도리어 대우하지 못했으니,

큰 덕()이 있고 지극히 어진 그대가 나보다 먼저 이루었소.

부디 옛날의 교분(交分)을 잊지 마시고 일을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부득이 말한다.

"통 속에 금액이 남았으니 목욕함이 좋겠습니다." 박박이 목욕을 하여 부득과 같이 무량수(無量壽)

이루니 두 부처가 서로 엄연히 대해 있었다.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다투어 와서

우러러보고 감탄하기를, "참으로 드문 일이로다."했다.

두 부처는 그들에게 불법(佛法)의 요지(要旨)를 설명하고 나서, 온몸으로 구름을 타고 가 버렸다.

천보(天寶) 14년 을미(乙未; 755)에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즉위(<고기古記>

천감天監 24년 을미乙未에 법흥왕法興王이 즉위했다고 했으나 그 선후가 뒤바뀐 것이

어찌 이렇게 심할까)하여 이 말을 듣고 정유(丁酉; 757)년에 사자(使者)를 보내서 큰 절을 세우고

이름을 백월산 남사(白月山 南寺)라 했다. 광덕(光德) 2(<고기古記>에는 대력大曆 원년이라고 했으나 역시 잘못된 것이다)

갑진(甲辰; 764) 7 15일에 절이 완성되자,

미륵존상(彌勒尊像)을 만들어 금당(金堂)에 모시고 액자(額字)

'현신성도미륵지전(現身成道彌勒之殿)'이라 했다.

또 아미타불상(阿彌陀佛像)을 만들어 강당(講堂)에 모셨는데, 남은 금액(金液)이 모자라

몸에 전부 바르지 못했기 때문에 아미타불상에는 역시 얼룩진 흔적이 있다.

그 액자는 '현신성도무량수전(現身成道無量壽殿)'이라 했다.

논평해 말한다. "()은 참으로 부녀의 몸으로서 섭화(攝化)했다 할 만하다.

<화엄경(華嚴經)>에 마야부인(摩耶夫人) 선지식(善知識)이 십일지(十一地)에 살면서 부처를 낳아

해탈문(解脫門)을 여환(如幻)한 것과 같다. 이제 낭자의 순산한 뜻이 여기에 있으며,

그가 준 글은 슬프고도 간곡하고 사랑스러워서 천선(天仙)의 지취(志趣)가 있다.

, 낭자가 만일 중생을 따라서 다라니(陀羅尼)를 해득할 줄 몰랐더라면

과연 이같이 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 글 끝귀에는 마땅히, '맑은 바람이 한자리함을 꾸짖지 마오'했어야 할 것이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대개 세속의 말과 같이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해 말한다.

푸른빛 떨어지는 바위 앞에 문 두드리는 소리,

어떤 사람이 해 저문데 구름 속 길을 찾는가.

남암(南庵)이 가까운데 그리로 갈 것이지,

푸른 이끼 밟고서 내 뜰을 더럽히지 마오.

위는 북암(北庵)을 찬()한 글이다.

골짜기에 해 저문데 어디로 가리,

남창(南窓)에 자리 있으니 머물다 가오.

밤 깊어 백팔 염주(念珠) 세고 있으니,

이 소리 시끄러워 길손의 잠 깰까 두려워라.

위는 남암(南庵)을 찬()한 글이다.

10() 솔 그림자에 한 길을 헤매다가,

밤 초제(招提)로 중을 찾아 시험했네.

세 통에 목욕 끝나니 날도 장차 새는데,

두 아이 낳아 던져 두고 서쪽으로 갔네.

위는 성랑(聖娘)을 찬()한 것이다.